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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의 유래

다음은 태극기 연구가 송명호 선생님께서 운영하시는 태극기 종합 자료 사이트(http://www.songpr.com/)에서 문의하신 질문을 중심으로 발췌한 것입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홈페이지에 있는 양질의 사진들을 거의 첨부하지 못했으니 위 사이트를 직접 방문하셔서 다양한 사진 자료도 함께 열람하시면 궁금증 해결에 큰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태극기의 유래

맨처음 국기 이름은 '조선국기'

우리나라의 국기가 맨 처음 만들어졌던 조선왕조 시대 때에는  나라의 이름인 '조선'과 함께 '조선국기'라 불렀다. 당시 조선왕조를 나타내는 국가의 명칭이 '조선'이었기 대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1882년 최초의 국기가 만들어지고나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기전까지 37여년 동안은 '조선국기'로 불리어져왔었다.

 

태극기라는 말의 유래


 '조선국기'가 '태극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던 때부터였다.  18세기 말엽 조선왕조는 관리들의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나라 꼴이 허약해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조선왕조를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이에 격분한  애국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으로 일본에 맞섰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 운동를 펼치기로 하였다. 이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손에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 제작을  하였는데, 그때만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본 경찰은 탑골공원이며 종로거리이며 동대문 성벽까지 가득 메운 인파들이 그렇게도 많은 태극기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당혹한 나머지 태극기를 든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팔뚝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은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국기를  바라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해방되기 3년전인 1942년 3월 1일에는  한국 임시정부수립 23주년 3.1절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국기  이름을 '태극기'로 정하고 그 존엄성을 명문화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태극기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실로 1882년의  일이며, 그로부터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3.1대혁명 발동에 있어서도 여전히 태극기를 썼으며, 그 깃발은 혁명군중의  선혈에 물든 채 적의 총검 위에 꽂혀졌다. 이처럼 태극기는 3.1대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 한국 주권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역사의 빛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태극기에는 부숴질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나라를 되찾겟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국기 문제가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876년에 있었던 병자수호조약을 맺을 때 부터였다.  조약을 맺기 1년전에 일본은 우리에게 문호 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우리의 허락도 없이 군함 운요호를 정박시켰다. 강화도를  지키던 우리 수비병대가 즉각 대포를 쏘며 대항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 버렸다. 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정부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즉, 군함을 허락없이  정박했다 하더라도 국가를 표시하는 일본기를 엄연히 게양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포격을 하게된 이유를 따지자, 우리 정부는 속시원하게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만해도 우리 정부에서는 국기라는  말 조차도 없었으며, 도대체 무엇을 국기라고 하는지 조차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  챈 중국은 황준헌이라는 사신을 통해 삼각형 바탕에 용을 그린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국기로 그려 사용할 것을 간섭하기도 하였다. 그후 우리나라와  중국은 아예 국기 만들기 연락 사신을 임명하여 수시로 접촉토록하였는데  우리나라측 사신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은 마건충이었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국기에 대하여 마땅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한 터라 이미  대륙을 상징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중국이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하여 집요하게 간섭을  하게 된 까닭은 조선왕조의 땅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국기를 만들어야겠다고 나서게 된 것은 1875년에  있었던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문호를 요구하면서 허락도 없이 강화도에 그들의 군함 운요호를 무단  정박시켰다. 이에 격분한 강화도의 우리 수비병대는 즉각 대포를 쏘며  대응했다. 우리 수비병대와 일본군 사이에 몇 차례 불꽃튀는 교전이  벌어졌으나, 우리 수비병대는 신무기로 대항하는 일본의 군사력 한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우리 수비병대가 가지고 있는 대포의 사정거리는  멀리 나가봐야 칠백여 미터 정도였지만, 일본이 무장한 대포는 그 보다  몇배 멀리 나갈 뿐만아니라 명중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피해는 당연한  우리 수비병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는 35명이 죽었지만  일본군은 겨우 2명 정도밖에 죽지 않았다. 이런 피해를 당하고도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보상 요구 조차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더 피해 요구를  많이 해왔다.  그 이유로는 일본 군함 운요호에  게양되었던 일본기가 우리 수비병대의 대포에 의해 불타 없었졌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트집은 이러했다. 나라를 표시하는 국기를 달고 바다를 운항하는  모든 배들은 전쟁이나 약탈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데,  강화도 수비병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포격을 했고, 더군다나 나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일본기를 고의적으로 명중시켜 불태웠다는 주장이었다.

국기? 무엇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일본은 수비병대 35명의 목숨을 잃은 것 보다 더  분노에 차 있었다. 일본기를 대포로 쏘아서 불태운데 대한 응분의 사과와  보상이 없으면 정식으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니 참으로 답답할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우리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당한 방어를 하다가 오히려 피해를 더 입은 우리측이 일본기  하나 잘 못 건드려 낭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 보다 큰 망신이 어디있겠는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일본이 요구하는 보상과 함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고, 국기의 필요성을 수모와 함께 느끼게 되었다.

 

한국 태극문양과 중국의 태극문양

태극문양하면 우선 중국의 주역에 나타나는 태극도안이 떠오르게 되어 모든 태극문양을 중국의 것으로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중국의 태극문양과 한국의 태극문양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중국의 태극문양은 음방을 검정색으로 칠했고 양방을 백색으로 칠했으며, 반드시 좌우로 대칭된 음방과 양방의 머리에는 어김없이 눈이 있는가하면 둘레에는 8괘가 배치되어 있다. 그런 반면에 한국의 태극문양은 음방을 청색으로 칠했고 양방을 홍색으로 칠했으며, 눈이 없는 음방과 양방은 좌우 또는 상하로 대칭되고 네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가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문화와 의식은 서로 모방하고 응용하는 가운데 창조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먼저냐를 따지기보다는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태극문양을 놓고 국적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최초의 태극기

여러 문헌에 의하면 태극기가 우리 나라의 국기로 처음 상징된 것은 1882년이었으며, 당시 수신사 박영효(1861∼1939)가 국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종황제로부터 허락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일제 침략 36년 동안 처절한 압박과 함께 천태만상의 변형을 거치다가 1949년 10월 정부에서 현재 모습의 태극기를 제정하였다.  이러한 유래에도 불구하고 무슨 영문인지 1882년에 그렸다는 최초의 태극기 실물이나 그림이 보존되지 않아 태극기의 역사가 단절되어 왔었다. 그 동안 역사학계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최초의 태극기를 찾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소망은 성취되지 못했다.  마침내 1997년 8월 8일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관련 기사가 게재된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를 발견하여 52주년 광복절날 공개함으로써 115년만에 그 실체를 역사의 사실로 확인하게 되었다.(관련기사 '최초의 태극기그림 발견' 1997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시사신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박영효가 최초의 태극기를 도안하고 그린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시사신보가 발견되므로 써 새로운 사실로 밝혀진 것은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하고 도안한 사람은 박영효가 아니라 고종황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박영효는 고종황제가 창안한 태극기를 일본 방문 도중에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황제의 명령대로 옮겨 그린 인물에 불과할 뿐이다. 고종황제는 중국의 국기를 본 따 만들라는 중국측 간섭에 대하여 매우 분노하였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오히려 고종황제는 국기 도안에 대하여 독창성을 발휘하여 도안의 방향에서부터 재질의 선택에까지 상세하게 지시하였다.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 하여,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홍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易掛)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이러한 고종황제의 명령이야말로 태극기 도안의 독창성을 분명하게 설명해준 것이라 하겠다.

 

태극기의 의미

흰색 바탕과 태극문양

종전 복잡하고 통일되지 않은 태극기의 의미를  2002년에 그동안  국민들의 보편적인 의미만을 수렴하여 쉽고 친근하게 부여했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나 첨가를 하지 않아야 함

 

흰색바탕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의미함

 

태극문양 의미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 (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이상을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태극기에 담긴 이러한 정신과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이룩하고,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4괘의 의미

네 모서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爻 : 음 --, 양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건괘 (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각각 상징한다. 이들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룬다

 

4괘 그리기   

1. 4괘는 건, 곤, 이, 감으로 하되, 깃면의 왼쪽 윗부분에 건을, 오른쪽 아랫부분에 곤을, 오른쪽 윗부분에 감을, 왼쪽 아랫부분에 이를 각각 배열한다.

2. 괘의 길이는 태극지름의 2분의 1(깃면너비의 4분의 1)로 하고, 괘의 너비는 태극지름의 3분의 1(깃면너비의 6분의 1)로 하며, 괘와 태극 사이는 태극지름의 4분의 1(깃면너비의 8분의 1)을 띄운다.

3. 괘의 길이중심을 깃면의 두 대각선상에 두되, 그 길이는 두 대각선과  각각 직각을 이루도록 한다.

4. 괘의 구성부분은 효(효)로 하되, 그 효의 너비는 괘너비의 4분의 1 (깃면너비의 24분의 1)로 하고, 효와 효사이 및 끊어진 효의 사이는 효너비의 2분의 1(깃면너비의 48분의 1)로 한다.

5. 괘는 검정색으로 한다.

 

태극기 변천사

우리나라 국기는 1882년 최초로 만들어진 이후 숱한 시련과 수난 속에서도 그  뿌리와 정신만은 굳건히 지켜왔다. 특히 일제 36년 동안이라는 잔인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 육신은 비참하게 찢기었어도 '태극기' 그 이름만은 고이 간직해왔다. 이런 과정속에 존재 하기 위해서 여러 모습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음 변천단계들은 변천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태극기가 굳건히 지켜지기까지의 우여곡절속에 나타난 수 많은 종류들을 분류해 본 결과 시대와 지역에따라 주로 많이 사용된 유사 종류들중에 특징적인 것 하나씩을 이해 본위로 내세운 것이다.
 
□ 1단계태극기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1882년에 수신사 박영효일행이 일본을 방문 할 때 고종황제로부터 허락받은대로 배안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있으나 당시 그렸다는 태극기모습이 나타나지 않아 애를 태웠으나 태극기연구가 송명호(시인. 필명 송명)씨가 115년만에 일본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조선에 처음으로 국기가 만들어졌다는 기사와 함게 태극기 그림이 실린 시사신보(1882.10.2.월요일)를 발견,이사실을 1997년 8월 15일 언론에 공개하므로써 115년만에 그 발자취를 찾아내게 되었다. 괘의 모습은 현재의 태극기와 상당히 다르고 음방과 양방의 배치도 좌우 대칭되어 있다.

□2단계태극기
   1885년 고종황제가 당시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시사신보가 발견되기전까지만해도 이 태극기가 최초의 태극기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하였다.현재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있다.

□3단계태극기 

1896년에 발행한 독립신문 제호에 도안된 태극기.독립신문의 제호 태극기는 발행될때마다 그 모양이 다르게 되어 혼란을 초래했다.



□4단계태극기   
 1900년 파리 박람회 장소에 게양하였던 태극기. 특징으로는 유연한 곡선의 음방(청색)과 양방(홍색)이 좌우로 배치된 것과 4괘가 귀퉁이에 있지 않고 열십자 방향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5단계태극기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 공표한 대한민국 국기. 지금의 태극기 도안이 되기까지에는 42인의 국기시정위원회의 수차례 의논과 우여곡절을 겪고나서 결정되었다. 당시 이왕에 해방과 함께 새로룬 국가가 탄생하였으니 국기도 새로운 도안으로 만든 것이 어떻겠는가는 논란이 가장 두드러졌으나 ,일제 36년동안 일본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묻고  조국의 광복을 빌었으니 그분의 넋을 달래고 또 갈라진 남북이 통일되면 한반도 전체의 의견이 수렴된 국기를 만들 기회가 있으니 도안과 4괘의 이치가 다소 논란이 있드라도 일제 36년.동안 가장 많이 그려지고 사랑하였던 현재의 태극 도안대로 국기를 결정하기로 하였다.